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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2-02 23:46
글쓰기가 삶에 미치는 영향
 글쓴이 : 남지
조회 : 451  

    글쓰기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란 주제로 원고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글 공부하는데 참조하시길.

 

글쓰기의 앞면과 뒷면

글쓰기가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글이라고 해서 잠시 망설였다. 글쓰기와 삶, 두 축의 관계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어떤 종류든 글을 쓰고 있고, 삶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글쓰기의 영향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이다. 내 개인사에서 글쓰기가 인생에 약이 됐는지, 독이 됐는지, 그 약과 독이 글쓰기 때문이었는지 아닌지도,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개인적 경험에 불고할지도 모르는, 내가 의식한 글쓰기의 막연한 느낌에 대한 단면 몇 개를, 단상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청탁자의 요구에 답하고자 한다.

 

1. 고강도의 뇌근육 강화운동으로서의 글쓰기

 

학생들이 종종 묻는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나는 뻔한 답을 준다. “많이 쓰고, 그 보다 더 많이 생각해”, “무얼요?” 다시 묻는다. “사화와 너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요?”, 또 묻는다. “그건 너 한테 맞는대로 해” .

글쓰기 수업이 끝나고 상담을 청하는 학생들과의 질문은 대략 이렇게 진행된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쓰는 비법을 터득해서 남들보다 효율적으로 수업을 따라갈까라는 학생의 욕망과 어떻게 하면 이런 부질없는 질문을 효율적으로 떼울까?’라는 선생의 욕망이 교차된다. 가끔씩 글쓰는 직업이 아니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는 학생이 찾아오면 대화는 좀 달라진다. 그 에게는 글은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이 없는 지독한 노동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말해준다. 그리고 이 지루한 노동을 그나마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준다. “너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서 개념화 해봐라” “글을 쓰되 여러 가지 글을 많이 쓰는 것 보다는 한 가지 주제를 파고들어라” “새로운 글을 쓰지 말고 써 놓은 글을 리모델링하는 방법으로 훈련해라.” 등등.

글쓰기 공부의 첫 단계는 글쓰기가 고강도의 뇌근육 운동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근육운동이 무게를 들었다 올렸다 반복해야 하듯이, 글쓰기도 쓰기를 되풀이 하는 것 말고는 뇌근육을 키우는 방법이 없다. 이 깨달음 위에 운동방법의 효율성을 추구해야 글쓰기 공부의 올바른 틀이 생긴다. 독서를 많이 하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지만, 오해에 가깝다. 쓰기를 전제하지 않는 독서는 지적 관광에 불과하다. 대학원에서 논문을 써 본 학생들은 깨닫는다. 세월이 지나면 자기가 쓴 것만 자신의 지식으로 남는다는 것을.

쓰지 않으면 자기 지식이 되지 않는 이유는 언어의 불완전성에 있다. 어떤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늘 좌절을 동반한다. 글을 써 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생각대로 글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글을 쓰는 과정에서 글과 생각은 대화를 나누고 타협점을 찾는다. 이 과정을 통해 생각은 단단해지고, 글은 명료해진다. 물론 뇌가 매우 괴롭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사람이 큰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요?”란 질문이 떠오르면, 먼저 이런 의문을 던져보길 권한다. “ 나는 글을 잘 써서 나를 표현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당장 잘 쓴 글의 소유자로 남들 앞에 등장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2. 나를 비추는 거울?나를 감추는 가면?

 

글쓰기를 하면 사고력이 큰다. 그렇다면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할까? 정서는 감성과 이성이 만나는 방식이다. 정서가 안정된 사람은 생각과 감정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난다. 정서가 불안정한 사람은 생각과 감정의 만남 또한 불안정하다. 당연히 행동이 돌발적이고 불안정하다. 일반적으로 글쓰기는 정서 안정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글을 시간을 달리해서 여러 번 읽다보면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과 조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때 나는 이런 경우를 두고 미처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내가 드러난 것인가?”아니면 내가 아닌 모습을 글을 쓰면서 꾸며낸 것인가이런 양자택일의 질문을 던졌다. 그럴 때면 언제나 내가 그럴듯한 외양을 꾸며낸 것이 아닌가 하는 미심쩍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잘난 척, 고상한 척, 착한 척, 진지한 척, 따뜻한 척......모든 종류의 척함이 글에서 묻어났으니까. 그래서 그런 낌새가 보이면 다음 글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 글 역시 뭔가 꾸며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이 거짓말이나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만큼 씁쓸한 것도 없다. 지금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느낌이 사라진 건 아니다. 대신 지금은 이런 느낌에 대해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내 경우 나이가 들면서 생각의 변화가 가장 심하게 일어나고 있는 부분은 인간 존재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이삼십대는 인간이 매우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혹은 그래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했고, 존재 자체가 매우 분명한 실체라는 생각을 했다. 나 자신 매우 분명하고 자유로우며 주체적인 생각을 하고 있고 그렇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자신이 상상하는 자신의 고유한 모습조차 사실은 상투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관점에 서면, 글 속에 드러나는 낯선 자기 모습이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던 진정한 자신의 일부인지 아니면, 그럴듯하게 꾸며댄 이미지인지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차피 거울에 비춰볼 고정된 자기 모습이 없고, 거울에 비춰볼 자기 모습 자체가 지금 글 속에서 그럴듯하게 꾸며내는 이미지들을 통해 만들어져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최초에 척함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고, 세상에 던져내 보이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수용하면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 끝까지 자기가 주인으로서 책임을 지는 태도이다. 지금 내가 자기 모습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의 인정과 동의를 거치지 않고 세상의 좋은 이미지들을 내 것으로 날치기한 것일 수도 있다.

글쓰기를 통해 나를 비추고, 새로운 나를 발명해가는 마음노동을 견디는 힘은 좋은 정서에서 나온다. 좋은 정서는 다른 생각, 다른 사람, 다른 가치에 곁을 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지를 말한다. 지속적인 성찰적 글쓰기를 가능케 하는 힘이 정서의 힘이라면 그 반대의 생각도 성립하지 않을까? 다시말해 원래 정서가 허약한 사람도 지속적인 성찰적 글쓰기를 하다보면 불가피하게 마음의 근육을 강화해야하기에 자기 안에 방치해둔 마음의 여지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글쓰기가 정서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주기위해서는 하나의 단서가 필요하다. 그 글쓰기가 도구적 글쓰기 여서는 안 되고 성찰적이어야 한다. 도구적 글쓰기는 글이 다른 목적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는 경우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글을 써도 남들에게 지식을 현시하거나, 취향의 고상함을 뽐내기 위해 쓰는 글, 글의 내용이 자신도 허위라는 것을 직감하면서 쓰는 것은 도구적 글쓰기에 해당한다. 성찰적 글쓰기는 설령 직업적인 글쓰기라도 글 쓰는 자신을 성찰하면서 쓰는 경우이다. 전자는 자기자신과 대화가 안 되며, 자기 내면을 착취하기 때문에 쓰면 쓸수록 공허해진다. 반면 후자는 앞에서 언급한 자기구성과정으로, 길게 보면 자기 충전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글은 아무리 성찰적이라 해도 글쓰는 순간순간은 이런 저런 욕망과 의지의 도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자기 글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행의 한 방법으로 말을 삼가는 묵언 수행이 보편적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도 말을 많이 하면 내면이 불안정해진다는 오랜 경험의 방증이다. 말을 많이 하면 내면이 불안정해지는 것은 언어의 불완전성과 관계가 있다. 말은 기호학적으로 과잉과 결여만을 안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말은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을 다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핍이요, 내가 전하고 싶지 않는 것도 전달되기 때문에 과잉이라고 말한다. 언어의 본성이 이럴진대, 도구적으로 하는 말, 의도된 거짓이 포함된 말을 하면 거기에 대한 책임의식 때문에 내면이 불안정해지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이 지점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명상을 떠올려 보자. 명상은 마음속에서 시시각각 떠오르는 말을 지워서 몸이 하는 묵언을 듣는 훈련이다. 명상을 해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사람들은 침묵하는 순간에도 혼자서 말을 하고 있다. 정신분석의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욕망으로 움직이고, 욕망은 언어를 사용하는 문명화의 결과이다. 말글은 인간에게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반대로 그 자신(주체)를 만드는 기본 구조이다. 라캉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인간 삶의 이해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라캉 식으로 말과 삶의 관계를 단순화 하면, ‘말을 많이 하면 내면의 공허가 커지지만 그것을 채우는 것은 소통 밖에 없고, 소통은 말을 매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해결의 형식논리는 되도록 말을 적게 하고, 되도록 내면을 공허하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되도록 타자와의 소통을 위해서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정면으로 방해가 되는 것은 타자를 지배하기 위해 말을 하는 것, 속이기 위해 말을 많이 하는 것이다. 즉 언어를 매개하는 권력행위이다. 바른 말글은 권력추구행위의 도구로 말을 사용하는 것과 정반대로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말하기와 글쓰기는 다르지 않다.

 

3. 바른 말, 고운 말, 좋은 말

 

바른 말은 현재 다수가 동의한 말이다. 사전에 정의된 표준어. 사투리는 바른 말이 아니다. 고운 말은 순한 말이다. 상대가 들어서 편한 말, 적의를 느끼지 않는 말이다. 욕설은 바른 말도 고운 말도 아니다. 그렇다면 바른 말 고운말은 그 자체로 좋은 말인가? 나는 바른 말 고운 말에 하나 덧붙여 정의로운 말을 좋은 말의 요건으로 추가하고 싶다. 좋은 말이란 바른 말 ,고운 말, 정의로운 말 세 요소가 충족된 말이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보자. 직장 상사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한 말단 샐러리맨이 사무실 빌딩 옥상에서 상사를 원망하고 있다. “정말 부장님 너무 하셔라고 혼자 고운 말로 중얼거린 사람과 그 새끼 지는 뭐가 잘 났다고라고 욕설을 퍼부은 사람. 이 경우 우리는 후자를 이해한다. 오히려 전자를 지나치게 반듯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 욕설은 타인에게 무해하고, 화가 난 당사자의 분노를 해소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사회의 집단적 상황으로 고스란히 가져가 보자. 약자들은 억울함을 자주 경험하고, 자신의 처지를 설명할 능력도 없는 경우가 많으며, 능력이 있더라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억울한 심정들이 억압되어서 분출의 기회가 있으면 격렬한 방식으로 터진다. 여기에 바른 말 고운 말을 들이대는 것은 이들을 이렇게 만드는 권력의 언어에 대고 정의로운 말을 요구하는 것보다 결코 좋은 말이 아니다. ‘정의로운 말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하기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어떻게 말하느냐 보다 누구에게 말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바른 말 고운 말로 속내를 가장하는 권력의 언어를 비판할 때는 격렬한 말이 좋은 말이 될 수도 있다. 사회적 약자들을 이해하는 글을 쓸 때는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좋은 말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표준어는 수도중심의 말이다. 고운 말은 배운 사람들의 말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지배계층의 말이다. 인도의 여성철학자 스피박은 서발턴(자기 언어를 갖지 못하는 사회의 최하층민 집단)은 자기 현실에 대해 스스로 요구하는 법을 모른다고 했다. 그들이 자기 현실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발언권과 발언 방법(적절한 언어사용방법)에 대한 무지의 결과이다. 이들에게 자기 언어를 찾아주는 것이 욕설과 상말 밖에 없다면, 바른 말 고운 말이 아닐지어도 정의로운 말이다. 바른 말 고운 말은 절차적이고 도구적인 미덕 밖에 없다. 요즘의 미디어에 바른 말 고운말로 된 정의롭지 못한 말이 얼마나 많던가. “지방대생들을 차별하지 맙시다란 말은 정의로운 말 같지만, 사실은 차별하면서 난 차별 안해요라고 연기하고 싶은 사람이 숨어 있을 뿐이다. 차별은 지방대라는 명사자체로 이미 90% 완료된다.

글쓰기는 타자와 사회관계를 맺는 중요한 경로이다. 글쓰기 자체는 권력에 봉사할 수도 있고, 소통과 사랑에 기여할 수도 있다. 나는 좋은 글쓰기는 후자의 경우로 확신하며, 고운 말 바른 말보다 정의로운 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이 훨씬 중요한 자질이라고 본다. 정의로운 말로 타자들과 접속하고자할 때 글쓰기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