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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5-23 12:37
[논제 : 인사파동] 우리 안의 포르노그래피 (김학의 스캔들)
 글쓴이 : 이완기
조회 : 292  
우리 안의 포르노그래피

‘아이즈 와이드 셧’이란 영화가 있다. 거장이라 불리는 스탠리 큐블릭의 유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뉴욕 상류층 부부를 통해 인간의 굴절된 성적 욕망을 표현했다. 하지만 한국에 개봉될 당시 대중에게 관심을 끈 건 거장의 이름값도 인간의 근원적 욕망 따위가 아니었다. 할리우드 실제 부부의 벌거벗은 나체와 영화 속 등장한다는 집단난교와 같은 에로티시즘만이 대중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부푼 맘을 안고 극장을 향했던 대다수 관객들은 실망(?)을 안은 채 발걸음을 돌렸다.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흥행 참패였다.

이런 우리의 모습은 비단 영화를 접할 때만 국한되진 않는다. 은밀함이 채색된 사회적 이슈에 진정 응시해야 할 지점은 어느새 사리지고 없다. 연예인과 연예인 지망생 사이의 성적 추문에 혹시나 있을지 모를 스리섬을 상상하고, 미용사의 성폭행에 미용실이란 좁은 공간으로 눈을 돌린다. 연예인 지망생이 가지는 착취적 구조, 미용실 스텝이 가지는 불안정한 고용은 어느 누구도 보지 않는다. 오로지 침대에만 주목하고 성기의 접촉에만 목을 매는 대중의 시선은 늦은 밤 포르노를 보는 시뻘건 눈과 닮아 있다.

그리고 지금, 대중의 포르노그라피적 시선은 권력의 상층부를 향한다. 성접대라 불리는 그곳 말이다. 그리고 한 건설업자가 사회 권력층에게 제공했다는 향락이란 텍스트에서 그들이 위치한 콘텍스트는 지워지고 없다. 오로지 그대들이 있던 별장이란 은폐된 공간, 그곳에서 행해진 그대들의 체위에만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진다. 심지어 언론은 애꿎은 ‘아이즈 와이드 셧’을 차용하고 그들의 ‘놀이’를 재연하는 도착증 증세도 보인다.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사회 지도층의 문란함’이란 프레임으로 굳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들의 행위에 읽어야 할 것이 이들의 추접스러움뿐일까? 방안에 있던 이들에게 손가락질만 가한다고 이 사태는 온전한 해결로 귀결될까?
 
아니 오히려 몇몇이 써내려간 행위적 서사만 집중한다면 그것을 둘러싼 구조의 모순을 보지 못한다. 정작 봐야 할 곳은 그들이 느낀 쾌락이 아닌, 머릿속에 그려진 사회의 그림이다.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업자가 일부에게만 향응을 제공한 데는 이유가 있을 터. 그는 몇몇에게만 화끈한 선물을 선사하면 이에 대한 응답 또한 화사할 것임을 알고 있었을 거다. 즉, 사업하는 이에게 이득을 안겨줄 수 있는 사람은 소수라는 것, 우리사횐 소수란 이들에게 온갖 이권과 힘이 모아져있다는 것, 그래서 적어도 그들이 속한 곳은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믿음이 바로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의 그림일 게다. 대중이 응시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허나 문제는 현대 사회의 만성적 피로에 취해버린 대중들이 포르노그래피에 몰입해 간다는 것이다. 그저 잠깐의 환각에 취해 거짓된 환상에 더욱더 매몰된다. 하지만 포르노는 거짓된 환영에서 출발하여 지루한 반복으로 끝맺음한다. 성접대를 바라보는 대중의 포르노그래피적 시선 또한 권력층과 사회에 대한 체념이란 허무로 점철되어 갈 것이다. 결국 순간의 도착에만 취한 채 방안의 난교에만 집착하는 건 모순된 현 사회에 회피하는 시선과 같다. 그건 대중이 선사하는 또 다른 대접, 면죄부일 뿐이다.



<교수님 첨삭>


■ 총평

01. 구조 내용 단순하다. 구조와 내용을 다각도로 꺾어 들어갈 필요가 있다.
02. 성에 대한 통념적 사고를 버려라.
      ex) 굴절된 성적 욕망? : 무엇을 기준으로 '굴절'이라 표현할 수 있나? 


■ 첨삭

01. 포르노가 보여주는 순간(성기) 집착의 개념을 차용한다면 모든 맥락을 덮은 채 돈에만 매몰된 사회와 공직자 태도에 집중해보라.
참고 할 글 (엄기호. 선거라는 포르노 중독, 경향신문, 2013.1.19) 읽어볼 것.


<수정한 글>

우리 안의 포르노그래피

‘아이즈 와이드 셧’이란 영화가 있다. 거장이라 불리는 스탠리 큐블릭의 유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뉴욕 상류층 부부를 통해 인간의 굴절된 성적 욕망을 표현했다. 하지만 한국에 개봉될 당시 대중에게 관심을 끈 건 거장의 이름값도 인간의 근원적 욕망 따위가 아니었다. 할리우드 실제 부부의 벌거벗은 나체와 영화 속 등장한다는 집단난교와 같은 에로티시즘만이 대중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부푼 맘을 안고 극장을 향했던 대다수 관객들은 실망(?)을 안은 채 발걸음을 돌렸다.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흥행 참패였다.

이런 우리의 모습은 비단 영화를 접할 때만 국한되진 않는다. 은밀함이 채색된 사회적 이슈에 진정 응시해야 할 지점은 어느새 사리지고 없다. 연예인과 연예인 지망생 사이의 성적 추문에 혹시나 있을지 모를 스리섬을 상상하고, 미용사의 성폭행에 미용실이란 좁은 공간으로 눈을 돌린다. 연예인 지망생이 가지는 착취적 구조, 미용실 스텝이 가지는 불안정한 고용은 어느 누구도 보지 않는다. 오로지 침대에만 주목하고 성기의 접촉에만 목을 매는 대중의 시선은 늦은 밤 포르노를 보는 시뻘건 눈과 닮아 있다.

그리고 지금, 대중의 포르노그라피적 시선은 권력의 상층부를 향한다. 성접대라 불리는 그곳 말이다. 그리고 한 건설업자가 사회 권력층에게 제공했다는 향락이란 텍스트에서 그들이 위치한 콘텍스트는 지워지고 없다. 오로지 그대들이 있던 별장이란 은폐된 공간, 그곳에서 행해진 그대들의 체위에만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진다. 심지어 언론은 애꿎은 ‘아이즈 와이드 셧’을 차용하고 그들의 ‘놀이’를 재연하는 도착증 증세도 보인다.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사회 지도층의 문란함’이란 프레임으로 굳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들의 행위에 읽어야 할 것이 이들의 추접스러움뿐일까? 방안에 있던 이들에게 손가락질만 가한다고 이 사태는 온전한 해결로 귀결될까?
 
아니 오히려 몇몇이 써내려간 행위적 서사만 집중한다면 그것을 둘러싼 구조의 모순을 보지 못한다. 정작 봐야 할 곳은 그들이 느낀 쾌락이 아닌, 머릿속에 그려진 사회의 그림이다.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업자가 일부에게만 향응을 제공한 데는 이유가 있을 터. 그는 몇몇에게만 화끈한 선물을 선사하면 이에 대한 응답 또한 화사할 것임을 알고 있었을 거다. 즉, 사업하는 이에게 이득을 안겨줄 수 있는 사람은 소수라는 것, 우리사횐 소수란 이들에게 온갖 이권과 힘이 모아져있다는 것, 그래서 적어도 그들이 속한 곳은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믿음이 바로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의 그림일 게다. 대중이 응시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허나 문제는 현대 사회의 만성적 피로에 취해버린 대중들이 포르노그래피에 몰입해 간다는 것이다. 그저 잠깐의 환각에 취해 거짓된 환상에 더욱더 매몰된다. 하지만 포르노는 거짓된 환영에서 출발하여 지루한 반복으로 끝맺음한다. 성접대를 바라보는 대중의 포르노그래피적 시선 또한 권력층과 사회에 대한 체념이란 허무로 점철되어 갈 것이다. 결국 순간의 도착에만 취한 채 방안의 난교에만 집착하는 건 모순된 현 사회에 회피하는 시선과 같다. 그건 대중이 선사하는 또 다른 대접, 면죄부일 뿐이다.    - (수정 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