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일의 홈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작성일 : 13-06-28 16:16
[월간중앙]2004년 09월호 (2004.09.01)_[남재일의 그 사람을 깊이 읽다] 그를 만든 생각과 감정의 조각들 한대수
 글쓴이 : 남지
조회 : 412  
   http://magazine.joinsmsn.com/monthly/article_view.asp?aid=215177 [38]

요즘 20대는 한대수를 잘 모른다. 그가 18세의 어린 나이에 <행복의 나라로>를 발표한 68년에 그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20대가 <행복의 나라로>란 노래는 기억한다. 이 노래는 한대수가 27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버린 뒤에도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까지만 해도 <행복의 나라로>를 모르는 대학생은 거의 없었다. 자리를 비운 35년 동안 한 대수는 주인 없는 그의 노래로 전설이 됐다. 나는 요즘도 간혹 인사동 단골 술집에서 그의 노래를 듣는다. 그의 노래는 이상하게 질리지 않는다. <동백아가씨>가 유행하는 시절에 만들어진 노래인데도 전혀 낡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 힘이 궁금했다. 시대를 초월해 인간의 감성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정신을 통찰한다는 말이다. 흔히 그런 능력을 천재성이라고 한다. 합리적 수재는 남들이 같다고 말하는 것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천재는 남들이 다르다고 하는 것에서 같음을 본다. 그 힘으로 한 시대의 취향과 패션을 넘어 다음 시대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분명 한 대수는 아무런 예고편 없이 느닷없이 나타났고 돌연 사라진 뒤에도 오래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그는 최근까지 모두 열장의 앨범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리고, 종종 한국에서 열리는 공연에 게스트로 참석하기도 했다. 종종 그에 관한 기사가 나오기도 했지만 그는 언제나 풍문처럼 뜬금없이 나타났다 다시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의 삶도 몹시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십대의 나이에 “태양만 비쳐도 살겠다”는 노래말을 생각했을까? 대중매체를 통해 드문드문 파편처럼 전해지는 그의 이력은 이런 궁금증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는 핵물리학자이던 아버지가 17년간 실종되고 어머니가 재혼해 떠나면서 부산의 할아버지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거기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미국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했다. <행복의 나라로>는 그 무렵 만든 노래다. 그는 영어로 시도 쓰고 사진도 찍는다. 스무살 때 결혼해서 20년을 함께 하던 아내와 이혼하고 지금은 22살 연하의 러시아계 여성이란 산다. 미국서 지속적으로 앨범을 발표했기 때문에 국내에서 그를 잊고 있던 시절에도 일본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미국생활의 자세한 사정에 대해 거의 아는바가 없다. 그럼에도 만만치 않는 삶의 역정이 함께 했으리란 짐작이 간다. 지난해 그가 한국으로 나와 활동을 시작했다. 그 사이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해서 미국 생활의 이모저모를 대충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떻게 어린 나이에 그렇게 조숙한 노래를 만들 수 있었는지, 그리고 57세의 나이에도 왜 지속적으로 노래를 하려고 하는지 끝내 궁금했다. 사실 나는 그의 노래보다 생각이 더 궁금했다. 복잡한 인생역정 속에서 한 인간이 겪을 법한 모종의 정신의 변화에 끌렸고 치열한 경험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삶에 대한 촌철살인의 통찰을 기대했다.

인터뷰는 8월 4일 서울에서 일차로 한 뒤에 6일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에서 그가 공연을 하는 모습을 본 뒤 한차례 더했다. 첫 인터뷰 때 신촌의 오피스텔을 방문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공연중이라 어수선하게 악기가 늘어뜨려진 그의 방은 별다른 장식 없이 생활을 위한 최소한만 갖추고 있었다. 때마침 한국에 나온 아내가 있어서 인근 카페로 이동하던 중 길거리에서 세 명의 팬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그의 모습은 동네아저씨 같았다. 그는 단순하고 친근한 어투로 사람을 대했다. 매우 다변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숨기거나 더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인터뷰를 하면서 매우 지적인 사람이지만 단순한 화법을 구사하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닮아 있었다. 나는 자잘한 사실을 가지치기하고 곧바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편안하게 남 얘기하듯 거침없이 자신을 드러냈다. 그는 오래 자신과 놀고 또 놀아서 이미 자신을 풀어주기로 생각한 사람처럼 보였다.

남 재일 : 선생님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 안에 각기 다른 3인분의 인생이 교차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누가 봐도 한대수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대수: 아무리 자신을 오래 동안 쳐다본 사람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건 어렵죠. 그건 그 사람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넘쳐서 그렇죠. 사람이 살아서 욕망하는 한 ‘어떤 사람’으로 고정되지 않으니 알 수 가 없죠. 나 역시 그래요. 많은 생각을 했지만 답은 없었고 한 가지 확인한 건 내가 내 안의 결핍 때문에 뭔가 계속 희망한다는 것이었어요. 이 나이까지 나에 대해 알아낸 유일한 사실이 그겁니다.

남 재일 : 구체적으로 그 희망은 어떤 것인가요?

한 대수 : 제가 생각하는 행복의 이미지는 이런 겁니다. 마누라 손을 잡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면서 지나치는 사람과 인사처럼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주고받는 것. 그런데, 그게 사실은 가장 어렵죠. 인간 자체가 아주 선량한 마음도 있지만 쾌락에 취약한 탐욕적인 동물이어서 사회가 상처 없이 편하게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은 아니죠. 나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결핍이 거기서 비롯된다고 봐요. 선량한 속내를 드러내고 그만큼 타인의 속내를 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그 허전함을 돈과 권력과 쾌락으로 메우려고 발버둥치는 거죠. 나는 그 허전함을 음악 만드는 일로 메워왔어요. 뭔가 만들 때 나는 가장 행복했고, 앞으로도 그러면서 살 수 있길 희망하죠.

남 재일 : 선생님은 인간을 기본적으로 악한 존재라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대수 : 나는 인간은 그냥 동물이라고 봐요.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고 쾌락과 고통에 민감한 육체를 가진 동물. 변덕스런 인간성은 다 거기서 비롯되죠. 도덕이나 행복을 생각할 때도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죠. 그런데, 성선설을 신봉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외면해요. 나는 사람이 도덕적이고 행복하려면 기본적인 동물적 요구는 충족돼야 한다고 봐요. 우스개로 말하면 “당신의 모든 구멍이 만족하면 당신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어요. 눈이라는 구멍은 아름다운 걸 보고 싶어 하고, 코는 좋은 냄새를 맡고 싶어 하고, 귀는 아름다움 음악을 찾고, 입은 맛있는 음식을 원하죠. 피부의 모공은 부드러운 촉각을 원하고..... 성적인 쾌락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남 재일 : 모든 구멍의 만족을 추구하는 삶은 통념상 쾌락주의로 분류가 될 것 같습니다. 사회의 지배적인 도덕은 대체로 동물적 욕구를 억압하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모든 개인의 구멍을 만족시키려면 엄청난 물질적 수요가 발생하고, 이게 사람들을 이기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 모든 사람의 모든 구멍을 만족시키는 방법론이라 할까요, 선생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한 대수 : 흔히 우리가 쾌락주의라고 부르는 태도는 사실 구멍이 막힌 사람들의 자세죠. 사회적 억압에 과민해서 감각을 죽여 버린 사람들이 뒤늦게 느끼려고 하니까 강한 자극이 필요해 뭔가에 탐닉 하게 되죠. 그런데, 구멍을 충족시키는데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아요. 기본 건강 되고 삶에 낙천적인 사람은 어느 음식이든 맛있게 돼 있죠. 음악도 요즘 얼마나 싸게 들을 수 있어요? 지구위의 남녀비율은 반반이잖아요, 사랑도 얼마나 지천에 늘려 있나요? 비싼 음식, 수억짜리 스피커, 미남미녀라야 감각이 만족되는 것은 구멍이 막혀버린 사람들의 관념 때문이죠. 이게 정말 문제죠.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부를 축적하고 물질을 소비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다 보면 시간이 다 가버리고 나중에는 물질을 갖다 발라도 구멍이 열리지 않죠. 그러면 열린 구멍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타인의 행복을 그냥 봐주지 못하고 공격하게 돼 있어요. 사람사이가 행복해지려면 이런 욕구불만이 없어야 하고, 그러려면 최소한의 물질로 감각을 달랠 줄 아는 미니멀리즘이 필요하죠. 남 재일 : 현대인은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미니멀리즘과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전체가 그러니 거기서 벗어나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요, 개인이 미니멀리즘을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이 뭐라고 보십니까?

한 대수 : 유목민은 이동 때문에 최소한만 갖고 다니죠. 그들에게 축적과 장식은 헛된 소모에 불과해요. 경작민은 축적된 재산과 장식 때문에 어딘가로 떠나지를 못해요. 유목민은 그걸 포기하니까 그 대가로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봐요. 유목민은 본능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갈망해요. 그러니 축적과 장식의 편리함을 버릴 수 있겠죠. 미니멀리즘을 하려면 유목민처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하고 그게 우리 사회에서는 타인에게서 새로움을 찾는 길 밖에 없다고 봐요. 이게 절실하면 물질을 축적하는 것보다 사람에 시간을 투자하겠죠. 나는 그렇게 살아요. 그래서 별로 가진 게 없어요.

남 재일 : 선생님은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도 대중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는데, ‘한철장사’인 대중음악에서 이례적인 태도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10집까지 꾸준히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음악은 선생님에게 어떤 존재 이유가 있습니까?

한 대수 : 그건 내 성장사하고 연결이 되는데.....자서전에 자세히 썼다시피 나는 평범할 수 없는 아이였어요. 열일곱살 때 미국에 있는 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났는데, 기대와 달랐죠. 뉴욕으로 떠날 때는 함께 야구 하고 낚시 다니는 꿈에 부풀었는데, 아버지는 바빠서 얼굴보기 힘들었고 미국인 어머니와는 의사소통조차 잘 안됐어요. 아버지가 안 보일 때 보다 더 큰 상처를 받았어요. 그때 얼마나 고독한 인상을 하고 다녔던지 담임선생님이 심리학 박사에게 상담도 시키고 그랬어요.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표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지 시를 써보라고 권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영어로 시를 쓰고 나중에 음악을 붙이면서 음악 인생이 시작된 거죠. 이 시기에 음악은 누군가를 향한 나의 하소연과 같았어요. 나중에 성인이 돼서 제 상담교사를 만났는데 “ 너는 무엇을 표현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자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니, 음악이 내 생명의 은인이죠. 그러니 내가 이 애인을 배신할 수는 없는 거죠. 그게 내 운명이니까.

남 재일 : 선생님 음악은 정치적 색채도 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체로 고립된 ‘골방보이’는 정치보다 내면적 정서에 몰입하는 게 일반적인데 정치적 성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한 대수 : 아마도 할아버지 영향이 아닌가 싶은데.....제 삶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은 신학자였던 할아버지였어요. 제가 살면서 하는 일들을 가만히 보면 거의 할아버지가 하셨던 일을 모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할아버지는 신학자지만 음악을 좋아해서 바이올린을 했고, 사진도 배우셨어요. 덕분에 저는 어릴 때 클래식에 묻혀 지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할아버지 서재에 책이 아주 많았는데, 특히 사상서가 많았어요. 당시에는 그런 책을 읽을 나이가 아니었지만 나중에 미국 가서 사상서 꽤나 읽었어요. 정치적 성향이 있다면 아마 거기서 생겼을 것이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당시 미국의 신좌파 운동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봐요. 히피운동이 주장하는 반전과 평화는 개인적 문제에 몰입하는 사람과도 궁합이 잘 맞잖아요. 싸우지 말고 사랑하자는 거니까,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과도 잘 맞잖아요. 그런데, 난 스스로 내가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냥 개인적인 삶을 방해하는 사회적 폭력에 대해 불만이 많고 그걸 해소하기 위한 생각을 많이 하죠.

남 재일 : <행복의 나라> 가사 중에 ‘아 나는 살겠네, 태양만 비친다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게 십대 후반에 나올 수 있는 생각이 아닌 것 같숩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당시의 독재를 은유하면서 개인이 소통하는 열린사회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정치적 지향이나 방법론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자체가 그 나이에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합니다.

한 대수 :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요. 그 나이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미국 가서 아버지 집에서 살면서 만든 노래들은 내 존재의 고통에 관한 건데....비우고 싶었고, 누구라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절박함을 담고 있어요. 나는 어린 나이에 인생을 가불해서 압축적으로 늙어버린 경험이 있어요. 그 때문에 소멸에 대한 공포도 일찍이 느꼈고.... 그래서, 살아 있음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싹트게 된 건지도 모르죠. 사람들이 저보고 그래요. 아주 비관적이면서도 낙천적이라고. 난 그게 하나도 안 이상해요. 일찍이 세상이 호의적이지 않았으니까 사회에 대해 의심이 많고, 절대적으로 고독했으니 사람 그 자체를 반가와 하는 성향이 생긴 것이겠죠. 내게 정치적 성향이 있다면 여기서 비롯됐지 않나 싶어요. 개인과 절박한 소통을 꿈꾸면 방해하는 사회적 힘도 더 예민하게 느끼게 되고 그게 비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겠죠. 나는 정치적 입장이 내면의 요구에서 자연스럽게 올라와야 한다고 봐요. 주입에 의한 정치적 이념은 효율을 떠받드는 광기로 흐르기 쉽죠 . 왜 그런 정치적 입장을 견지 하는지 뿌리가 없기 때문이죠. 히틀러나 스탈린주의 같은 게 그런 경우들이죠.

남 재일 : 선생님의 정치적 입장을 굳이 규정하면 ‘좌파 개인주의’가 맞을 것 같습니다. ‘문화 좌파’도 무난하고요. 이 입장은 좌파적 지향을 갖되 볼세비키 혁명처럼 집단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개인적 삶의 변화를 통해서 서서히 변화시키는 방법론을 전제 합니다. ‘종교는 가라’(No Religion)는 노래에 “맑스나 레닌도 여러분을 해방시켜주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획일화 되고 특권화 된 노동자 계급에 의한 독재였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집단적 동원과 독재에 대해 회의적인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적인 자유 시장 논리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정치적 이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한 대수 : 난 정치는 대다수에게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태까지 있었던 정치체제는 이런 점에서 불만족스럽죠. 집사람하고 결혼하고 페레스트로이카 직전의 모스크바를 갔는데 아파트가 다 똑같더군요. 사람들은 늘어져 있고 무심하고 생기가 없어 보이고 대다수가 평등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향 평준화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미국의 뉴욕은 그 반대죠. 무엇이든 세계 최고와 최하가 공존하는 공간이죠. 생기발랄하지만 대다수가 피곤하기 그지없는 곳이죠. 나는 제도 자체가 완전한 삶을 선물해 준다고 생각지 않아요. 그래서, 제도를 어떻게 바꾸어야 되는가 보다 개인이 무얼 해야 하는가에 더 관심이 많아요. 저는 개인의 힘을 믿어요. 그러나, 개인이 현실 정치에 미치는 결과적 영향력은 사실 매우 단기적 것이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들이 일상적 삶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켜나가는 것이고, 여기에서 핵심은 자신의 내면적 요구와 정치적 입장을 주체적으로 연결하는 정직함이라고 봐요. 내 경우 그러한 내면적 요구는 권력이 아닌 사랑으로 연결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갈망이죠.

남 재일 : 정치든 뭐든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데 대해 매우 민감하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노래에서 그런 태도를 ‘종교’라는 표현으로 지적하셨습니다. 종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한 대수 : 기독교적 집안에서 자랐지만 기독교에 대해 의혹이 많죠. 우선 사후 세계를 천당과 지옥으로 나누면서 겁주는 게 싫고.... 또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나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여야 기독교도가 되는 건데 저는 그게 안 되더라고요. 이런 걸 믿어라는 것은 어떤 확신을 검증하는 건데, 나는 이런 태도가 무서워요. 모든 종교전쟁은 자기가 믿는 교리에 대한 확신을 명분으로 자행됐잖아요. 종교가 한 개인한테는 좋을 수 있어도 집단적 신념으로 번지면 시너지를 일으켜서 광기로 변하는 것 같아요. 이념도 종교적 도그마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도 제도화된 도그마에 의지해서 체제를 강압적으로 유지했기 때문에 내부의 생기가 고갈돼 붕괴한 거죠.

남 재일 : 저는 종교가 개인의 신앙과 제도화된 권력의 두 얼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예수와 교회 조직을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과 성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 대수 : 나는 성경뿐만 아니라 종교의 모든 경전을 문학작품으로 읽어요. 삶에 대한 하나의 비유로 보는 거죠. 거기에 나온 말 하나를 절대적인 도그마로 물신숭배 할 때 종교는 광기가 될 수 있다고 봐요. 예수도 역사 속의 한 위대한 인간으로 봐요. 삶에 대한 천재적인 통찰력과 뛰어난 언변, 희생정신을 갖춘 보기 드문 사람......주장하는 바가 사랑과 평화였으니 로마시대의 걸출한 히피라고 봐도 되겠죠. 모든 종교의 교리는 바닥에 사랑과 용서 화해를 깔고 있는데 히피운동의 핵심도 사랑과 평화였어요. 이들이 종교와 다른 점은 종교가 대체로 신체적 욕망을 억제하고 사랑을 헌신으로 규정하는데 히피는 사랑을 육체적인 것으로 봤죠. 사랑하는 데는 30초만 하면 되고 보복하는 데는 30년이 걸리니 사랑해야 세상이 평화롭고 인생은 여유롭다는 생각, 맞잖아요.

남 재일: 최근 앨범 10집은 매우 개인적인 고백 같았습니다. ‘상처’ 는 아내의 음주벽으로 인한 고통을 담백하고 옮겨 놓았습니다. 이런 개인적 고통을 노래로 옮겨 놓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게 선생님이 음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사랑과 평화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습니다.

한 대수: 정직한 고해가 인간관계l에 도움을 준다는 건 뉴욕이라는 도시가 가르쳐 주었어요. 뉴욕은 흉터는 흉터대로 아름다움은 아름대로 드러내요.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홈리스가 우글거리죠. 사람들도 그래요. 바쁘게 살아서 그런지 듣기 좋은 빈말 주고받으며 시간 낭비 안해요. 직장, 여자, 마약, 돈, 섹스 모두 솔직히 얘기해 버리죠. 저는 살아가면서 정직함이 가장 좋은 소통의 태도란 걸 배웠어요. 포장하고 과장하면 관계가 겉돌죠. 사람은 서로의 고통을 솔직히 드러내고 위로 받을 때 가장 충만해지는 것 같아요. 문제는 누가 먼저 자신을 드러내서 신뢰를 주느냐는 것이죠. 나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자신의 고통을 솔직히 드러내는 데서 많은 위안을 받았기 때문에 음악을 통해 드러내는 나의 상처도 많은 위안이 될 걸로 믿어요. 그리고, 이렇게 나를 드러내는 행위는 내가 나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해요. 예컨대, <무한대> 앨범에 보면 딴 남자를 만나서 떠나 버린 전처 얘기도 있어요. 대외적으로는 쪽팔리고 개인적으로는 고통스런 과거죠. 그렇게 쪽팔리는 현실이지만 그걸 드러내고 내가 그렇게 별 볼일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 오히려 편해졌어요. 나는 백 마디의 우아한 설교보다 한마디의 정직한 고해가 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남 재일 : 앨범에 보면 전부인 얘기도 나오고 현재 부인 얘기도 나옵니다. 그리고 그 부인들은 종류는 다르지만 각각 상처를 안겨준 것으로 나옵니다. 여성이 선생님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진데요 선생님의 여성관과 취향이 궁금합니다.

한 대수 : 남녀가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아요. 너무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겠죠. 나도 남들처럼 삶에서 여자가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데, 난 여성에 대해서 콤플렉스가 많아요. 첫 번째 결혼은 이혼으로 끝나고 두 번째는 외국여자랑 결혼했는데, 문화적이 차이도 있고 나이 차이도 22살이나 돼서 세대차이도 심해요. 사실 저는 아주 평범한 행복을 찾는데 왜 이렇게 특이한 쪽으로 나가는가에 대해 생각을 좀 해봤어요. 그게 마더 콤플렉스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은 유년의 상처에서 자유롭기 어려운데 저는 어머니가 그래요. 어머니와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결핍으로 인해 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착해요. 그런데, 너무 몰입하다보니까 거기에 맞는 여성, 말하자면 나와 비슷한 여성만 만나요. 그러면 캐릭터가 강한 두 인자가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강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건 그만큼 피곤을 수반한다는 얘기죠. 사실 나는 매우 심심한(boring)여성을 만나고 싶은데 한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심심한 여성과 집에서 TV 나 보면서 늘어져 있고 싶은 갈망이 늘 있었어요. 그런데, 만났다 하면 모두 강력한 여자들이죠.

남 재일 : 그러면 여성과의 관계가 늘 긴장은 되지만 피곤하지 않습니까? 하긴 누군가는 여자는 심심한 여자와 피곤한 여자 딱 두 부류가 있다고 합디다만....

한 대수 : 그러게 말입니다. 난 심심한 여자를 그리워하는데 그런 여자들이 날 안 좋아해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어릴 때부터 외로움이 심해서 혼자 못 산다는 거예요. 첫 번째 결혼도 스무살에 했거든요. 나는 누가 옆에 없으면 굉장히 힘들어요. 육체적인 관계가 중요한 게 아니고 누가 옆에 있다는 느낌 자체를 굉장히 갈망해요. 누가 옆에 있어야 작곡도 돼고 효율도 높아져요. 지금 아내는 모스크바 출신인데 돌아다닌 걸 좋아하고 술도 많이 마시죠. 그래도 혼자보다는 좋으니까 피곤한 여자와 사는 게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맞춰가며 살죠.

남 재일 : 선생님은 삶도 심심함보다는 피곤함을 선택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살면서 고통스런 순간과 맞닥뜨리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한 대수 : 나는 고통과 맞닥뜨리면 주로 혼자서 해결하려고 해요. 눈물을 흘리는 것이 가장 좋아요. 정신적인 배설 같은 거라서 울고 나면 기분이 맑아져요. 상황자체를 해결하려고 대안을 찾고 그러지는 않아요. 그냥 고통과 슬픔은 그 자체로 내 버려두면 시간이 알아서 처리하죠. 요즘 사회는 너무 행복에 대한 강요가 심한 것 같아요. 행복하지 않은 상태를 못 견디게 해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죠. 우울과 비애 같은 파토스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닐가 싶어요..

남 재일 : 음악 만들지 않고 편하게 쉬는 시간은 주로 뭘 하시는 편입니까?

한: 주로 여행 하죠. 여행이 좋아요. 제 삼자로서 누리는 방랑의 자유가 있어서 정신적으로 큰 휴식이 돼요. 사진 찍고 그 동네 사람들과 술 마시고 그래요. 여행지로는 포스트 모던 아트를 볼 수 있는 베를린 같은 도시가 좋고요. 여행하면서 사람과 예술에 대해 느끼는 거 그거 만큼 재미있는 것도 드물죠. 집에 있으면 요리가 낙입니다. 요리하는 과정은 단순한 노동이면서 사람을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어서 마음이 편해져요. 그리고 뭔가 남잖아요. 남들에게 줄 수도 있고....

남 재일: 음악 이외의 일도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경험들이 음악에는 어떤 도움이 됐나요?.

한: 코리아 헤럴드 기자도 했고 상공부 디자인 포장센터도 다녔죠. 코리아 마케팅이라고 광고 대리점도 했고요. 생업 따로 음악 따로 그렇게 살았죠. 뉴욕서도 스튜디오나 사진현상소에서 일을 해가면서 살았어요. 그런 일들이 음악에 직접 도움을 주지는 않지만 삶에 대한 느낌을 주니까 음악의 재료가 되어주죠.. 일상의 지루함, 밥벌이의 고통, 이런 걸 통해 사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을 받고 그게 곡으로 연결되죠. 전 창작의 공부는 현장에서의 사람 경험만한 게 없다고 봐요. 필립 글라스라는 전위음악가도 택시 운전했고 로드 스튜어트도 장례식에서 무덤 파는 노동자였으니까요.

남 재일 : 선생님은 국적은 미국인데 혈통은 한국인입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사셨는데, 경계인 같은 인상도 받습니다. 이 점이 음악이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대수 : 가족사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내가 원하는 건 소박하게 정착해서 사는 거죠. 원래 양다리 걸치면 소속이 약하니까 결국은 둘 다 놓치기 쉬운데, 소속이 약하다는 건 사물을 보는 정직한 눈을 유지하는데는 도움이 돼요. 내가 내 감정을 지극히 단순하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죠. 그래도 선택하라면 한 쪽에 소속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요.

남 재일 : 한국에 완전히 정착하신건가요? 한국에서 활동 계획은 어떻게 세우고 있으신지?

한 대수 : 나는 한국이 좋은데 아내가 한국말을 못해서 잘 적응할지 의문이에요. 잘 적응해서 여기에 정착했으면 싶은데 아무래도 한국과 미국을 적당히 오가며 살겠죠. 활동은 노래 부르는 것은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고 해서 최대한 작곡을 많이 하려고 해요. 그런데, 사실 작곡도 나이 들어 즉흥적인 감흥이 주니까 작품 수도 점점 줄어요. 다른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몽고에 가서 사진 찍고 글 쓰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음악 외에 다른 일들을 생각 중 입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는 몇몇 단어를 강조했다. 고독, 고통, 절실함, 인간, 사랑, 음악 그리고 버림.....이 단어들은 그의 삶에서 모두 하나로 연결된 꼭지점처럼 보였다. 하나의 사연으로 가늘지만 절박하게 이어진 이 감정과 생각의 조각이 한대수라는 사람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무것도 잊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상처 혹은 사랑을 간직하기 위해 그는 무언가를 자꾸 버렸다. 그는 그런 태도를 미니멀리즘이라 했다. 그렇게 버리고 버린 까닭인지 그는 초로의 나이에도 소년 같은 면이 있었다. 어쩌면 삶의 고통을 가불해서 앞질러간 대가로 한번 더 원점을 맛보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낙천적 허무주의라는 말이 떠올랐다. 세상에 대한 헛된 기대를 미리 버렸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낙천적 자세와 자유. 죽었다 살아나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그는 누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삶을 지배하는 문체는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고통을 노래에 담으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때 그건 진심이다 싶었다. 그에게 상처와 사랑은 동의어가 돼 버렸다. 그의 10집 앨범 상처를 사랑의 노래로 다시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