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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2-12 21:41
사형폐지론의 그늘
 글쓴이 : 남지
조회 : 304  

이창동의 영화 ‘밀양’의 주인공은 어린 아들이 피살당한 어머니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 헤매다 기독교에 귀의해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작정하고 교도소를 찾아간다. 그런데 면회를 하러가서 만난 살인범은 “하느님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살인범은 이미 용서받았다고 하는 이 상황에 황당해 한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 억울함을 풀어야할지 방법을 찾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서서히 미쳐가고 자살 시도를 하기까지 이른다.

이청준의 원작소설 ‘벌레’는 주인공이 살인범의 사형집행 소식을 라디오를 통해 듣고, 자살한다. 물론 사형집행에 반대하거나, 살인범을 연민해서가 아니다. 법이 최대한을 수행했지만, 살인범이 용서받고 구원받은 상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좌절감 때문이다. 주인공이 자살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아마 ‘도대체 누가 내 아들의 살인범을 나와 내 아들의 동의 없이 용서하고 구원할 권리를 갖는가?’ 였을 것이다. 이 질문은 종교의 권위에 대한 질문이지만, 법제도적 권위에 대한 질문으로 확대해 볼 수도 있다.

얼마 전 젊은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오원춘의 무기징역 선고에 대한 세간의 반응을 떠올려 보자. 유족은 사형이 아니어서 실망감을 표시했고, 여기에 동조하는 누리꾼의 댓글이 상당히 많았다. 현재 우리사회는 실질적 사형폐지국가로 선고도 드물지만, 집행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시민들의 일반적 정서가 사형폐지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흉악범에 대한 재판이 있을 때 마다 사형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한다. 언론의 논조를 보면, 진보매체는 사형폐지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고, 보수매체는 사형존치론에 심경적으로 동조하는 정도이다. 사형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진보성향의 인사들이다. 나도 사형폐지라는 세계적 추세를 거스를 확신은 없다. 하지만 현재 사형폐지론이 주장되는 논거나 방식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피살자의 입장에서 시작해 보자. 길을 가다가 납치당해 사지가 절단되는 죽임을 당했다. 억울하다. 그런데 피살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살인범에 대해 피살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더 잔인한 보복을 원하는지, 용서를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가족이 피살자의 위치에 서서 대리인 행세를 하는 것이 폭넓게 인정된다. 여기에다 가족은 유족의 입장을 동시에 갖는다. 지독한 상실의 상처에 대해 피살자에 대해 무언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얘기다. 대개의 피살자 유족들은 살인범이 피해자가 당한 고통의 이상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의 형벌제도로는 그렇게 할 방법이 없다. 사형의 경우도 살인범의 목숨과 피해자의 목숨을 등가로 전제할 때만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응보가 된다. 그래도 살인 피해자 가족들이 사형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사라진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위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족이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은 용서가 피살자의 의사라고 확신해야만 한다. 만약 가해자에 대한 복수가 피살자의 의사라고 생각하면, 살아남은 자의 진정성은 복수를 통해서만 표출될 수 있다.

근대 형벌제도 이전에는 문화권에 따라 피해자 가족이 복수할 권리, 살인자를 ‘죽일권리’를 인정하는 관습이 흔했다. 하지만 일체의 사적인 폭력을 허용 않는 근대의 형법질서 속에서는 살인자에 대한 복수는 범죄행위에 불과하다. 그래서 피해자 가족의 죽일 권리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상상된다. 이스마엘 가다레의 ‘부서진 사월’은 알바니아 산악지대의 이슬람교를 믿는 한 부족의 풍습을 그리는데, 그들에게는 복수로서의 살인은 정의의 실현이자 명예의 회복이다. 살인이 정의가 되는 것은 부당한 살인에 대한 응징이기 때문이고, 명예가 되는 것은 종족을 공격한 적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살인자들에 대한 복수로서의 살인은 진정성의 발로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살인자에 대한 가장 좋은 판결은 피해자 가족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생각 같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이런 발상에 익숙하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친절한 금자씨’에 이런 상황이 등장한다. 피해자 가족들이 초등학교 교실에 가해자를 감금한 채 고문한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도 복수는 법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으로 설정된다. 복수의 주체가 법이 아니고 나란 얘기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은 복수를 진정성의 미학으로, 안티고네의 윤리학으로 옹호하는데 까지 나아가진 않는다. 복수의 공허함을 부각시켜 사적 폭력을 통한 복수를 금지하는 법제도적 질서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한다.) 무협영화와 서부영화 같은 장르영화에서 복수 코드는 스토리를 구성하는 단골 메뉴다. 우리가 그만큼 복수하는 주인공에 감정하고 열광한다는 얘기다. 그건 역설적으로 법제도적 질서를 통한 응보가 양에 차지 않는다는 것, 나의 윤리적 진정성에 가 닿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요약하면 이렇다. 젊은 여성을 살해하고 난도질한 오원춘에 대해 유족은 ‘죽일 권리’를 갖는다. 그런데 그 권리를 현대 형벌제도에서는 법이 가져간다. 사형제 폐지는 죽일 권리를 가져가서 집행하지 않는 것인데, 법은 생명을 직접 손상하는 악역을 피함으로써 법의 인자함을 과시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피해자 가족은 죽일 권리를 박탈당한다. 과연 법은 가해자를 죽이지 않을 권리가 있는가? 이 질문은 형량의 적고 많음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법이 피해자 가족의 권리를 가져가서 가해자를 죽음으로부터 면책할 권리가 있는가하는 질문이다.

법제도의 관점에서 이 질문에 답해보자. 먼저 피살자 가족의 죽일 권리를 법이 가져가는 것은 적어도 ‘직접 죽일 권리’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살인에 대한 사적 복수는 복수의 연쇄로 이어져서 폭력의 악순환을 낳기 쉽다. 그래서 법의 개입은 불가피하고, 피해자 가족의 ‘죽일 권리’를 법이 가져가는 것은 불가피하다. 법의 판단에 따라 법제도적 절차 속에서 가해자를 사형시키면 폭력의 악순환은 막을 수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법은 그 자체로 범죄인 살인을 형벌의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고 선포한다. 이른바 사형폐지다. 가해자가 어떤 이유로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권리는 인권의 범위에 속한다는 주장도 등장한다. 살인피해자 가족이 피해자를 대신해 죽일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월권이라는 의견도 제시된다.

사형폐지 주장의 이 모든 논거는 사회전체의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한다. 정신적으로 더 성숙한 사회를 위해서는 사형을 통한 복수보다 사형폐지의 취지를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것이 낫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비용을 지불하는 주체가 살인피해자와 그 가족이란 절대적 상황적 약자라는 사실이다. 피해자 가족에 ‘죽일 권리’가 어느 정도 있다면, 즉 적어도 그들이 법과 사회에 대해 무언가 피해에 대한 보상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면, 법과 사회가 해 줄 수 있는 최대치는 가해자 사형과 피해자에 대한 깊은 애도와 보상일 것이다. 적어도 사형제 폐지가 피해자 입장에서 설득력을 얻으려면 ‘죽일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법과 사회구성원으로부터 위무를 받는다는 느낌은 있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범죄피해자 국가 보상제도를 통한 보상도 그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렇지 못하다. 결과적으로 사형폐지를 통해 법은 만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인자한 모습을 현시할 수 있고, 사회구성원들은 복수의 연쇄가 야기할 폭력상황을 피할 수 있다. 즉 이들은 덕을 본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들은 단지 ‘죽일권리’를 박탕당하면서, 관용과 용서에 대한 사회적 압박까지 느껴야 한다. ‘밀양’의 여주인공을 미치게 한 바로 그 상황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살인피해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은 바로 나인데, 가해자를 즉음으로부터 면책하는 것은 법이고, 나는 동의한 적 없는 가해자의 인권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