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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24 20:30
일베의 정치심리학
 글쓴이 : 남지
조회 : 943  

 

 

1.

아래 하나의 인용문이 있다. 어떤 사람이 쓴 글일까 자유롭게 상상해보라. 직업을 상상해도 좋고, 정치적 입장을 생각해도 좋고, 심리적 성향을 떠올려도 무방하다.

 

여성은 원래 운명적으로 남성의 동반자이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은 일에서나 생활에서나 동료인 것이다. 수세기 동안의 경제적 발전이 남성의 노동영역을 변화시켰듯이, 논리적으로 여성의 영역 역시 변화시켰다. 함께 일할 의무 뿐만아니라, 인간자체를 보존하는 것도 남녀의 의무이다. 이 가장 고귀한 임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영원한 지혜로 남녀에게 주신 특별한 개인적 재능의 토대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생활의 동반자이자 일의 동료가 될 수 있도록 가족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가장 숭고한 과업이다. 가족의 최종적 파괴는 모든 숭고한 인간성의 종말을 의미한다. 여성의 활동 영역이 멀리까지 뻗어나간다 하더라도 진실로 유기적이고 논리적인 발전의 궁극적 목표는 항상 가족의 창조여야 한다. 가족은 국가의 전체구조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가치 있는 단위인 것이다. 일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명예롭게 만든다. 그러나 아이들은 여성을 고귀하게 만든다.

 

이 글이 현재 한국 신문에 실렸다고 가정하면, 남녀를 화해시켜 가정을 지키게 하려고 애쓰는 가정법원의 보수적인 판사 정도가 필자로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이 글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발췌한 것이다. 유태인 학살이라는 그의 행동만큼 그의 생각이 낯설어 보이는가? 생각과 행동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고향과 가정과 국가를 강조하는 것이 어떻게 유태인 학살이라는 만행과 연결됐는지 이해가 되는가?

우리는 나치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알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 나치가 투표로 집권해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등에 업었다는 사실도 종종 잊는다. 그 대중이 평범한 독일시민이었다는 점도 특별히 의식하진 않는다. 나치는 거저 하켄크로이츠(卍 )문양을 새긴 제복 속의 악마 정도로 기억된다. 아마도 유태인 학살 하나만으로 더 이상의 판단을 중지하고 윤리적 분노로 생각을 대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파시즘은 일회성의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 재발 할 수 있는 대중사회의 정치적 현상이다. 파시즘의 정서는 어느 사회나 억압된 채 잠복해 있어 언제든 정치적 사건으로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시즘을 바라보는 태도가 윤리적 분노에 그쳐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윤리적 분노는 ‘선한 우리’와 ‘나쁜 그들’을 나누고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우리 안의 파시즘을 외면하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대한 평가는 가능해도 예방은 어렵다. 파시즘은 대중의 일상 속에 깊이 스며있는 비합리적 사고습관과 정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시즘을 차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사회 전체의 정치적 건강성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 안의 무엇이 파시즘을 낳는 토양이 되는지 성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다.

지금 한국사회에 나타난 극우적 성향에 대한 시민사회의 대응도 이런 성찰적 태도가 필요하다. 일베를 ‘극우’, ‘네오 나치’등으로 명명하고, 정치적으로 논박하는 것은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자멸할 만큼 충분히 외설적인 언행에 정색하고 대응하는 것은 애초에 없었던 정치적 지위를 오히려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지금 시점에서 일베는 우려할만한 극우 정치세력이 아니다. 그들은 현재의 정치체제가 껴안지 못하는 대중들의 응축된 불만의 징후일 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주장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일베에 대해 해야 할 것은 정치적 논박이 아니라 질문이다. 일베는 대중 속에 광범위하게 극우적 정서가 확산되고 있는 징후로 볼 수 있는가? 일베를 탄생시킨 사회적 조건 혹은 정치제제의 공백은 무엇인가? 일베라는 증상에 대해 시민사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시민사회의 정치적 건강성을 성찰하는 방법이며, 극우적 정서에 대한 적절한 대처법이기도 하다.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극우의 원조인 파시즘의 심리상태와 정치적 행동 패턴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2

 

파시즘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통찰을 보인 사람은 빌헬름 라이히다. 1933년 나치 정권하에서 출간된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파시스트와 사회주의자 양측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나치는 파시즘에 대한 탈신비화가 위험해서, 사회주의자들은 ‘계급’보다 ‘성격’을 정치적 주체의 본질로 보는 시각이 반혁명적이어서 배척했다. 라이히 자신은 파시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설명의 한계를 프로이트를 끌어와 넘어서고자 했다. 파시즘에 노동자들이 적극 동조한 이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설명은 ‘경제적 토대와 이데올로기의 분열’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불리한 파시스트를 지지하는 것은 속아서이고, 정치적으로 각성하면 여기서 벗어날 거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한 라이히의 견해는 노동자들이 속아서가 아니라, 억압적 사회구조에서 형성된 권위주의적 ‘성격구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성격구조를 갖고 있는 대중에게 ‘당신들은 정치적으로 속고 있다.’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는 ‘성격구조’를 계급의식 보다 정치적 행동의 더 근원적인 동인으로 봤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성격구조는 어떻게 형성되고, 파시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라이히는 인간의 성격은 세 개의 상이한 층들로 구성돼 있다고 주장한다. “표면층에서 평범한 인간은 수줍고, 예의바르며, 인정이 많고, 책임감 강하며, 양심적이다.” “중간층은 잔혹하고, 가학적이며, 음란하고, 욕심과 시기심이 많은 철두철미하게 충동으로만 구성돼 있다. 심층은 인간이 타고난 생물학적 미덕이 보존된 층으로,”좋은 사회적 조건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이 가장 깊은 핵심에서 진정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협동적이며, 사랑을 하고 있는 동물,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 합리적으로 증오를 표출하는 동물이 될 수 있다“.

파시즘은 중간층의 성격적 특성이 표면층을 뚫고 표출되는 현상이다. 중간층에 정체성의 뿌리를 설정한 인간은 표면층을 위선으로, 중간층을 진실로 오인한다. 중간층은 가족, 학교, 교회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제도의 권위주의적 억압에 반발하는 내면적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이차적 성격층이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파시즘에 경도된 인간은 위선적인 지배체제에 대항해서 진정성을 표출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가 생각하는 진정성은 지배체제에 학대받으면서 형성된 공격성이다. 그는 상처를 자신의 본질로, 공격성을 진성성으로 오인하기 때문에, 진짜 진정성이 발현될 토양인 심층에는 결코 가닿지 못한다. 간단히 말하면, 파시즘적 인간은 억압은 인식하지만, 억압의 이유를 해석하지 못해 자유의 대안을 찾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억압의 주체를 적으로 끊임없이 불가능한 전투를 벌이며 싸우는 스스로의 모습에 도취된다. 이 자아도취의 환타지를 유지하기 위해 주변 대상을 혐오의 감정으로 대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자리는 언제나 공백으로 남는다. 이 자리는 자신의 공격성에 역사적 대의와 사회적 명분을 제공하는 지도자의 몫이다. 그는 지도자를 통해서만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느끼기 때문에 무의미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열광적으로 헌신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파시스트는 반역적 정서를 갖고 있지만 권위를 갈망하는 소심한 노예상태에 고착돼 결국은 반동적 사회사상에 심취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 요란한 퍼포먼스를 통해 결국 자신을 억압한 억압자의 노예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라이히는 이런 심리상태가 보편적인 인간성격의 한 단면이며, 특정한 사회조건 속에서 정치적으로 활성화 되는 것 뿐이라고 보았다.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이런 심리상태를 파고드는 내용들로 구성됐다. 고향, 혈통, 가족, 국가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표면층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독과 불안을 조건 없이 달래준다. 타락한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는 현실적 좌절을 윤리적 고양의 지표로 정당화 해 준다. 지도자에 대한 숭배와 열광적인 의식은 스스로 삶의 대안을 만들지 못하는 결여를 채워준다. 인종주의는 부정할 대상을 통해 유아기적 상처에 고착된 공격성을 드러낼 대상을 제공한다. 반지성주의와 여성혐오는 자아도취적 전사 환타지를 강화해준다. 한마디로 파시스트의 열광은 현실적 좌절을 정당화 하고 심리적 공백을 채우려는 안간힘이다.

라이히의 견해를 종합하면, 파시즘적 정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족, 교회, 민족, 국가에 대한 비합리적 생각들 속에서 자라고, 특정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폭발한다. 이런 주장을 통해 라이히는 파시즘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철학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있다. 파시즘을 촉발시키는 중간층의 성격구조가 공허하고 위선적인 자유주의 규범체계의 고요한 억압으로부터 초래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자유주의자든 마르크스주의자든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성에 대한 깊은 회의와 생물학적 자질에 대한 과도한 낙관을 전제로 계몽주의 세계관을 급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라이히의 설명에서 참조할 점이 있다면, 지금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규범이 파시즘적 정서를 불러오는 요인일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 ‘깨시민’이 경멸하는 일베의 행태가 종교처럼 인식되는 ‘민주주의’의 위선과 공백을 반영하는 그림자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3.

일베를 두고 정치적 극우세력이 등장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일베는 현상적으로 반민주적,반여성적,인종주의적, 지역주의적 논리와 폭력적이고 외설적인 언행이 특징이다. 어버이연합이나 자유총연맹 등 기존의 극우성향 보수단체는 반공주의를 특권화하고 전반적으로 반민주적 성향을 보였을 뿐, 여성혐오나 인종주의 같은 파시즘적 정서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반공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하는 권위주의 정권에 동원된 하부 조직일 뿐 독자적인 극우적 정치세력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베는 이들보다 더 나아가 반공은 물론, 여성혐오, 인종주의 등의 파시즘적 성향을 보이긴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혐오했고, 성적욕망은 극도로 억압 했던 파시스트와 달리 친자본주의적이고 외설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베는 일관된 정치적 이념과 지향이 없으며, 충성도가 떨어지는 점이 파시스트와 다르다. 회원들이 실체를 숨기며 온라인에서 익명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도 확신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일베는 극우 정치조직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무정형의 외설로 표출되는 정서는 파시즘적 요소가 다분하다.

일베의 회원이었던 고 성재기씨가 대표였던 남성연대는 일베의 정서를 사회운동으로 조직한 경우이다. 그래서 남성연대는 현재로서는 일베의 정서가 세상 밖으로 나와 정치운동으로 조직될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지표다. 남성연대의 현주소는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태다. 그 전에도 시민 공론장의 평판은 부정적이었다. 성씨가 생전에 했다는 말, "진보는 나보고 꼴보수라 하고, 보수는 나보고 찌질이라 한다"가 세간의 평가였다. 일부 젊은층 에서 충성그룹이 있었고, 쪼그라드는 가부장 권력을 아쉬워하는 일부 마초 엘리트들이 심경적 지원을 보냈을 뿐이다. 그나마 남성연대가 지향한 운동의 초점은 ‘남성인권’ 뿐이었다. 일베의 파시즘적 정서는 다 내려놓았다. 성공한 엘리트 여성에 대한 반감이 도드라진 정도였다. 그래도 대중적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다면 일베의 정서가 정치적으로 조직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베가 기존의 보수정치세력의 홍위병으로 동원될 개연성은 다분하다. 이념적 확신에 찬 파시스트는 지도자를 정점으로 뭉치지만 이념도 지도자도 없는 일베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대타자인 냉전이데올로기를 등대삼아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인다. 보수정치세력은 인터넷에서 절대적으로 약세인 진보와의 담론투쟁에서 보수논객들을 정치적 용병으로 활용하고, 보수논객들은 정치적 담론을 확산시키는 확성기로 일베를 이용하는 구도가 나타나고 있다. 결국 일베는 인터넷에 배치된 보수적 정치세력의 최고 말단 용병으로 이용당할 공산이 크다. 모든 극우의 운명처럼 자신들이 피해의식을 갖게 만든 지배세력의 수족으로 전락하게 될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깨시민’이 일베에서 봐야 하는 것은 보수이데올로기에 흡수되면서 이들이 끼치는 정치적 폐해가 전부는 아니다. 반동적 사상과 결합한 결말의 시작은 반역적 정서라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반역적 정서를 출현하게 한 사회적 조건 혹은 정치체제의 공백이 무엇인지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베 회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명확히 드러나진 않지만, 2030세대가 절대다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추측컨대, 이들은 사회경제적 약자이자, 문화적 빈자(학력이나 전문적 기술 등의 문화자본이 약한 사람)이고, 시민정치의 국외자(정치적 교양의 세례를 받지 못해 정치적 참여의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 일 공산이 크지 않을까? 물론 그 중에는 돈 잘 벌고 학벌 좋으면서 파시스트의 정서구조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수는 별로 가진 것 없고 정치적 참여로 처지를 개선할 의지가 없는 인물들이 아닐까? 그래서 사회에 대한 소외감과 불만을 외설적 히스테리로 터뜨리며 가장 안전하게 이 사회의 지배구조에서 집단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여자와 호남과 이주노동자를 공격하는 게 아닐까?

이 행태야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정치적으로 정형화 되지 않은 또 다른 유형의 사회적 약자(?)가 생성되고 있음을 고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신체 건강하고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취업에 실패한 어떤 20대를 상상해보자. 성장기를 입시경쟁과 게임에 빠져 보내면서 인성이 유아적 성향에 머물러 있는 인물이라면 앞으로 삶을 헤쳐 나가기 쉽지 않다. 이런 인물은 ‘실존적 약자’로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최악의 유형이다. 이런 인물 유형이 개인적 삶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양산된다면, 그건 분명 정치의 문제이다. 기존 정치가 만든 문제이자, 앞으로 정치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기존 정치의 어떤 공백이 일베를 배태했는지는 단언하긴 어렵지만, ‘일베짓’ 같은 파시즘적 독선은 삶의 실질에 가닿지 못하는 위선적 규범의 반동이라는 것이 라이히의 견해다. 그는 성격구조의 중간층에서 나오는 파시즘을 “거짓 자유주의(진정한 자유주의와 진정한 관용이 아닌)의 공허한 예의 바름에 대항한 학대받던 인간들의 수많은 반역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봤다. 그가 위선적 규범으로 예시한 ‘거짓 자유주의의 공허한 예의바름’은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출현하고 있을까? ‘인민을 위한’(for the people)은 사라지고 ‘인민에 의한’(by the people)이 민주(of the people)을 독식하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계일 수도 있고, 보수 대 진보의 경직된 정치적 대립구도가 당파의 권력 재생산을 위한 적대적 공생 관계로 흘러가는 정치의 통치화 일수도 있다. 그 어느 것이든 삶의 실질적 형식을 부여하는 진정한 정치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일베의 외설 속에는 대문자 정치가 사라진 사회 공간에서, 스스로 정치적 참여를 조직할 줄 모르는 무력한 자들의 절망이 스며있지 않을까? 그래서 반역적 정서가 외설적 히스테리로 표출되는 게 아닐까?

남성연대의 사무실에는 "프롤레타리아의 감정과 부르조아의 이성'으로란 구호가 붙어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적어도 연대의 대상이 프롤레타리아(남성)이라는 사실이 적시돼 있다. 하지만 욕망은 부르조아적 권위를 갈망하고 있다. 또 언젠가 성재기 대표는 "여성가족부의 예산으로 노인, 장애인, 그리고 군인, 경찰, 소방수의 복지에 쓰자'는 피켓을 들고 일인시위를 했다. 여기서 그는 노인과 장애인이라는 생물학적 약자(가장 확실한 실존적 약자)와 여성일반의 적대, 사회에 가장 헌신적인(동시에 국가권력을 유지하는) 박봉의 공무원 직종과 여성일반의 적대를 설정한다. 정서적 연대는 프롤레타리아(남성)과 하고, 정치적 공격은 여성을 향하고, 이데올로기적 위치는 국가주의 안에 있다. 이런 모순은 프롤레타리아의 곤경의 원인을 모르거나 외면하기 때문에, 그래서 부자와 빈자의 적대를 남자와 여자의 적대로 오인하기 때문에 비롯된다. 가부장적 가족 안에서 성장한 권위주의적 인간은 가부장적 권위에 도착돼 있기 때문에 계급의식의 형성이 지연된다는 라이히의 통찰이 그대로 들어맞는 대목이다.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이런 성격구조를 가진 사람, 즉 반역적 정서를 표출하는 정치적 참여의 방식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상상해보라. 어쩌면 일베충의 외설적 언행은 침묵하는 대중의 내면속에서도 꿈틀대고 있는 지향 없는 반역적 정서의 표식일지도 모른다. 이 점을 의식하지 않는 ‘깨시민’의 정치적 올바름이란, 라이히의 말처럼 “얼마나 공허한 예의바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