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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2-03 00:34
왜 성추행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글쓴이 : 남지
조회 : 165  

교수와 정치인, 공무원....사회적으로 행동의 품위를 지킬 것을 요구받는 직종의 성추행이 연일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뉴스만 보고 있으면 성추행 시비가 끊이지 않고, 세상이 막장으로 가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 쉽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뉴스에 보도되는 정도의 성추행은, 사실 지난 시절 묵인돼 왔던 일상이었다. 그래서 이런 뉴스가 지속적으로 터져나오는 것은

묵인돼던 악습이 문제시된다는 긍정적 변화의 징후로 읽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성추행이 앞으로 사라지면 가장 좋겠지만 말이다.

일상에 성추행이 만연하다는 것은 추행의 가해자가 별로 큰 문제의식을 못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중년 남성은 추행적 행동을

당연한 남성적 껄떡거림 정도로 여기는 남성문화의 끝자락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지금 전개되고 있는 성추행의 연쇄는 세대의 문제로,

기성세대가 가진 한계로 인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중념 남성들은 그냥 세대의 실패와 좌절을 인정하고 조심하는게 가장 좋은 처신일 것이다.

그런데  성추행의 지속적 발생이 과거의 잘못된 남성문화, 즉 시대에 뒤떨어진 아저씨들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좀 거시적으로 보면, 성추행은

계급적 불만이 성과 세대를 매개해서 터져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욕망의 정치(대중의 욕망을 탈정치적으로 정형화시켜내

는 것)는 여성의 신체를 포르노그래피로 배치하면서 대중들 앞에 들이민다.사실 이 지점에서 성추행의 가해자인 아저씨들은 미디어가 대중에게 가하는

성추행의 일차적 피해자가 된다. 보기만하고 만지지 못하게 하는 미디어의 성추행으로 대중의 성의식은 포르노그래피적 환상에 도착되고, 이 환상에 결여

된 촉각성을 일상 속에서 추구하고자 할때, 성추행이 말실수처럼 터져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성추행에 대한 처벌이 접촉과 말에 제한되고, 응시가 빠

져 있는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보기만 하되 만지거나 말로 지시하지 못하게 할때 성추행의 동력은 응축되고, 성의식은 지속적으로 포르

노그래피적인 형태로 고착될테니까. 그래야 미디어에 배치된 포르노그래피적 이미지가 대중을 쉽게 사로잡을 수 있을테니까. 결과적으로 조작가능한 대중

으로 배치가 용이할테니까. 성추행이 섹슈얼리티 시장의 약자들, 사회적 권력은 있지만 성적으로 별볼일없는 중장년층이나, 젊지만 사회권력이 없어서 여성일반에 대해 피해의식을 가진 '찌질이'들에 의해서 주로 저질러 지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포르노그래피적인 이미지에 포획돼 있는 상태, 쳐다보기만 하고 접촉할 수 없는 감금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히스테리적 발작이 성추행이 아닐까. 이런 가설이 설득력이 있다면, 노출로 매력을 뽐내는 여성이나 이

를 쳐다보는 남성이나, 미디어가 전시하는 포르노적 이미지에 현혹돼 욕망의 정형성 속에서 개성적인 성적 표현의 가능성을 놓쳐버리는 사람이  미디어의 일차

적 성추행의 피해자들이 아닐까. 그러니 성추행을 근절하는 방법은 미디어의 일차적 성추행, 여성의 신체를 포르노그래피로 배치하는 것부터 줄여나가는

것과 이런 욕망의 정치를 의식하고 여기에 저항하려는 수용자의 자세가 사회적으로 요구된다.  일상의 절제와 배려는 개인이 노력해나가야 할 문제이고. 

결과적으로 성추행이 공론장에 제시되는 방식을 자본이 추동하는 욕망의 정치와 생명정치의 한 유형으로 보면, 미디어를 통해 일차적 성추행을 대중에게 가함으로써 '미디어의 성적이미지를 응시하는 적극적 포르노 소비자로서의 주체와 일상에서 리비도의 억압을 스스로 수행하는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 그 목적일 것이다. 그 주체는 얼핏 예의바른 시민으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자유주의의 허상만을 정치로 인식하는 주체, 포르노적 욕망에 대한 죄의식으로 묶여 있는 주체, 계급적 모순과 같은 문제를 전혀 보지 못하거나, 보더라도 마땅한 문제제기의 방법을 찾지 못하는 주체(정치적 사건에 수반되는 절차적 폭력성 자체가 악-억압된 리비도와 유사한 그무엇-으로 인식되면서 거세된 존재일테니까)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성추행에 대한 미디어의 과잉반응은 정체성 정치의 한 유형으로 가장 넓게 시민적 주목을 받고 있는 '여성문제'를 공론화 함으로써 여성의 인권을 지지하는 진보적 관점을 취하는 것으로 얼핏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미디어가 가하는 일차적 성추행이 결과적으로 생산하는 정치적 의미가 문제제기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오히려 없애 버린다. 결과적으로 자본이 원하는  유형의 주체, 적극적인 소비자이면서 온순한 시민-인권 주장을 최종적인 정치적 문제제기로 상상하는 시민-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보면 성추행 담론의 기능은 자본과 미디어가 연출하는 욕망의 정치를 여성주의 담론을 끌어들여 연출자의 존재를 은페하는 것, 이차적 성추행 당사자의 존재를 부각시킴으로써 미디어를 통한 일차적 성추행 장본인의 존재를 가리는 것, 결국 아랫것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듦으로써 계급정치의 전선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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