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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06 21:57
위선-탈선-독선
 글쓴이 : 남지
조회 : 205  
아버지가 위선적이면
탈선과 독선이라는 두 아들을 갖게 된다.
탈선하는 아들은 위선과 대립되는 실재를 연기하기 위해,
선의 반대편에서 가장 적나라한 육체성을 진정성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는 아버지의 권위를 갖고 싶은 의지가 없다. 그래서 그는 탈선하는 수 밖에 없다.
탈선자를 이끄는 동력은 충동이다. 충동은 귄위의 해체를 통해 리비도의 표출을 추구하는 힘이다.
충동은 사랑과 예술을 추동하는 기본적인 힘이다.
독선에 빠지는 아들은
아버지의 위선적 권위를  대체하고자 하는 새로운 권위를 추구한다.
아버지의 권위를 부정하기 위해 진리의 지위를 요청하면서 독선에 빠진다.
독선자를 이끄는 동력은 욕망이다. 욕망은 권위의 점유를 통해 리비도의 장악을 추구하는 힘이다.
욕망은  표면적으로 어떤 대상을 향한든 궁극적으로 권력에 대한 의지이다.

절차적 민주주의, 형식적 법치주의, 언론의 형식적 객관주의 기타 등등
현 사회체제의 모든 영역의 지배적인 가치와 이념은 '절차적 정의'와 '실재'의 배제로
특징지워진다. 절차적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명징하게 제시하고,
강제하고, 공유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렇게 되면, 행위자는 절차적 정의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추구하는 전형적인 행위양상을 보이고,
그것을 정의라고 믿게 되기 쉽다. 말하자면 자신도 모르는 위선의 삶을 체화하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에 칼 슈미트 이런 사회를 염두에 두고 '기술경제적 사회'라는 표현을 썼다
모든 것이 기술적인 것, 경제적인 교환의 지평에서 가치판단되는 사회라는 의미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랑도 '주고 받는 것'이라는 경제적 교환의 행위로 정의 된다.
사랑은 무엇을 주고 받는지, 주고 받으면 자신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가 중요하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교환의 공정성이 사랑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절차적 민주주의의 경험은 대체로 위선적인 것으로 귀결되어갔고
거기에 대한 저항은 파시즘이라는 탈선과 볼세비즘이라는 독선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체제의 위선을 극복하고자 하는 독선도 사라지고,
탈선만이, 작은 탈선만이 남은 시대가 되어가는 것 같다.
 IS, 일베와 같은 것들이 그런 징후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