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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06 22:33
어느 광물의 꿈
 글쓴이 : 남지
조회 : 50  


고등학교 동기가 전시회를 했다. 오래 그림을 접었다가 복귀한 친구다. 오랜만에 적어 본 미술에 대한 글.



                                                           어느 광물의 꿈

 

30년도 더 된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미술반의 전시회에서 이상한 그림을 한 장 발견했다. 지하실 같은 검은 공간에 놓인 관과 곡괭이. 캔버스는 오직 검정의 짙음과 옅음으로만 공간을 식별할 수 있는 암흑천지. 이제 막 누군가 더 깊은 어둠으로 관을 묻어야 하는 순간을 담은 듯 했다. 뭉크의 목판화 절규가 전하는 검정의 식감이 물컹한 동물성이라면, 희미한 광선에 드러난 단정한 사각의 검은 관은 아삭한 식물성에 가까웠다. 희미한 빛을 따라 관을 이루는 나무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연두 빛 새싹이 거기에 있을 듯했다. 사춘기를 갓 지난 나이에, 초록의 이파리로 바람과 농탕이나 칠 때에, 그는 왜 어두운 지하실의 검은 관을 상상했을까? 그 안에 누워 있을 누군가를 그리워했을까? 아님 스스로 그 안에 눕는 꿈을 꾸었을까? 소멸을 앞두고 청춘을 돌아보는 기억의 일방통행로를 그는 왜 역주행 했을까?

몇 년 전 김문석을 만났다. 고교를 졸업하고 30년 만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한 번도 그를 본적이 없다. 고교 때도 서로 알던 사이가 아니었다. 오직 검은 관의 강한 이미지 때문에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정도였다. 그 사이 그의 삶은 험한 물길을 헤쳐 온 듯 했다. 그림을 손 놓은지도 오래 돼 보였다. 나는 그가 운영하는 카페에 종종 갔고, 꽤 많은 얘기를 했다. 그는 노장 사상에 깊이 젖어 있었다. 무위는 그의 욕망이 된 듯 했고, 침묵이 그의 수사학이 된 듯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여러 가지 방향을 실험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해 전시회에서 본 작품들은 온전히 를 드러내는 것 같지가 않았다. 뭔가 과잉돼 보였다. 평소 많지 않은 말이 작품 속에서 꿈틀대는 인상도 받았다. 그가 전화를 했다. 전시회를 위한 짧은 글을 부탁했다. 나는 그가 새로 작업한 작품을 보면서 한결 통일되고 정돈된 세계를 보았다.

모든 색채는 숯이 만들어 내는 검정으로 통일 돼 있었다. 지하실에 놓여 있던 관과 곡괭이는 무정형의 점들로 녹아 내렸다. 지하실이라는 닫힌 공간의 이미지는 흘러가는 시간의 이미지로 진화해 있었다. 전 작품에 통일된 기류가 관통했다. 나는 그 힘을 식물성 광물의 상상력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숯은 나무에 열을 가해 수분을 짜내고 남은 몸체다. 탈육화 된 형체를 존재의 본질 혹은 뿌리로 상상하면 우리는 광물이다. 새싹이 신록이 되고 낙엽이 되어 지층 켜켜이 석탄으로 묻히고, 그 광물이 빗물에 녹아 다시 생명으로 회귀하는 것이 광물의 시간성이다. 광물의 시간은 깊다. 삶은 그 흐름을 우연히 절단하는 순간의 사건이다. 처음도 끝도 없이, 버려진 현재만이 존재한다. 미래를 갖기 위해, 삶의 연속성을 얻기 위해서는 광물의 시간성을 삶의 시간으로 초대해야 한다. ‘나의 죽음너의 탄생이 구별되지 않는 세계, 그것이 광물의 세계이다.

자궁속의 어둠이 평화였다면, 관 속의 어둠은 안식이 될 수 있으리라. 세계의 기원이 어둠이고 빛이 순간적 어둠의 부재로 보인다면, 그는 광물이다. 순간성의 사건에 몰입하기보다 영원한 평화를 몽상하는 사람이다. 지하실에 놓인 검은 관은 우주의 암흑으로 돌아가는 간이역 처럼 보일 수도 있다. 모든 색을 다 섞으면 검은색이 된다. 모든 빛을 다 섞으면 백색(투명)이 된다. 식물은 오래 썩으면 검은 석탄이 되고, 동물은 오래 썩으면 검은 석유가 된다. 당신은 기꺼이 석유가 되어 누군가의 등잔을 밝히는 빛이 되겠는가? 김문석은 스스로 이 질문을 던지고 캔버스 위에 답을 내놓았다. 색채를 지우고 형상을 깨고 언어를 삼키며 은밀하지만 단호한 흐름 하나만을 남겨 놓았다. 나는 기꺼이 석탄이 되겠다. 살아서 식물이 되겠다. 아니 차라리 숯이 되겠다.

광물의 자리에서 꿈꾸는 강인한 식물의 이미지. 그게 의지라면 무()에의 의지일 터이다. 그게 욕망이라면 초월의 욕망일 터이다. 그리고 행여 그게 주장이라면, 각축하는 세계에서 오래 올바른 삶의 자리를 더듬으며 초월을 꿈꾸었던 자, 윤리적 아나키스트가 타인에게 건네는 식물적 삶에 대한 수줍은 권유일터이다.